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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리뷰

채식주의자 - 살갗 아래 꽃의 신음

by minorwtgr 2025. 4. 14.

 

식물이 되고자 했던 여인의 저항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평범한 가정주부 영혜가 어느 날 갑자기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시작되는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결정은 단순한 식습관의 변화가 아닌, 인간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억압에 대한 본능적 거부로 드러납니다. 영혜의 악몽에 등장하는 핏물 묻은 고기, 얼굴들, 그리고 그녀를 따라다니는 냄새는 그녀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폭력의 상징입니다.

소설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시점에서 영혜의 변화를 들여다봅니다. 첫 번째 부분 '채식주의자'에서는 남편의 시선으로 영혜의 변화가 묘사됩니다. 그는 아내의 변화를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자신의 불편함과 체면만을 걱정합니다. 가부장적 가족 구조 내에서 영혜의 저항은 '비정상'으로 낙인찍히고, 결국 가족 모임에서의 자해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영혜의 거부는 단순히 육식을 거부하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인간의 폭력성과 욕망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로 확장됩니다. "살해된 것들의 눈빛이 내 안에 모여 있었어"라는 그녀의 말은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게 행사하는 폭력을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한 충격을 보여줍니다. 영혜는 이 폭력의 연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인간성까지 거부하게 됩니다.

 

 

몸의 언어로 말하는 욕망의 풍경

 두 번째 부분 '몽고반점'에서는 영혜의 형부, 비디오 아티스트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는 영혜의 몸, 특히 그녀의 몽고반점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게 됩니다. 꽃과 식물 문양으로 채색된 두 남녀의 성행위를 촬영하고자 하는 그의 예술적 욕망은 결국 영혜와의 육체적 관계로 이어집니다.

이 부분에서 영혜의 몸은 예술적 대상이자 욕망의 투사체가 됩니다. 그녀의 채식주의가 폭력에 대한 거부라면, 형부의 예술은 다른 방식의 욕망과 지배의 표현입니다. 영혜는 "내 몸에서 꽃이 피어나고 있어"라고 말하며, 인간의 육체를 넘어서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냅니다. 그녀의 몸에서 자라나는 몽고반점과 식물 문신은 그녀가 인간의 폭력성을 탈피하고 식물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시각적 표현입니다.

형부와 영혜의 관계가 발각된 후, 영혜는 더욱 심각한 정신적 혼란 상태에 빠집니다. 그녀의 육체적 변형 욕구는 점점 더 절박해지고, 그녀는 음식을 거부하며 오직 햇빛과 물만으로 살고자 합니다. 이는 식물이 되고자 하는 그녀의 욕망이 극단적으로 발현된 모습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식물적 존재

 마지막 부분 '나무불꽃'에서는 영혜의 언니 인혜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영혜는 이제 거의 먹지 않으며, 두 손으로 물구나무를 서는 행동을 반복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나무가 되어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언니, 난 사람이 아니야. 내가 줄곧 착각하고 있었어."라는 영혜의 말은 그녀가 인간 존재로부터 완전히 이탈하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줍니다.

인혜는 처음에는 영혜를 '정상'으로 돌리려 애쓰지만, 점차 그녀의 변화를 이해하고 존중하기 시작합니다. 인혜 자신도 가부장적 사회와 가족 구조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며 살아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영혜의 극단적인 선택은 인혜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인혜는 영혜가 탄 구급차를 쫓아가며 상상합니다. "넓은 들판에 내려서, 잠시 서 있다가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이 열린 결말은 영혜의 변화가 완전한 자기 파괴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음을, 그녀의 식물-되기 여정이 어쩌면 새로운 존재 방식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단순한 채식 이야기가 아닌, 인간 존재의 폭력성과 그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영혜의 고통스러운 여정은 우리 사회에 내재된 폭력과 억압의 구조를 드러내고,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존엄을 찾기 위한 극단적인 시도를 보여줍니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 존재 방식에 내재된 폭력성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성찰하고 있는가? 영혜처럼 그 폭력의 연쇄를 끊기 위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채식주의자』를 단순한 소설을 넘어, 우리 존재의 근본을 성찰하게 하는 철학적 텍스트로 만들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