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함을 껴안는 여정
양귀자의 장편소설 『모순』은 20대 초반 여성 안진진의 내면을 따라가는 1인칭 시점의 성장소설이다. 책 제목 그대로 진진의 삶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소설은 그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살아가는 인물의 여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주인공 안진진은 어릴 적 부모의 이혼을 경험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왔다. 그는 남들보다 일찍 세상의 이면을 배웠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속으로 삭이며 살아간다. 겉보기엔 이성적이고 성숙해 보이지만, 관계 앞에서는 언제나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이러한 진진의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청춘들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진진은 연인 민우와의 관계에서 사랑과 실망을 동시에 겪는다. 민우는 자상하지만 무책임하고, 따뜻하지만 이기적이다. 그런 모순적인 모습을 지닌 그와의 관계를 통해 진진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주는 기쁨과 동시에 아픔을 깊이 체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점차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은 어떻게 정의되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모순』은 안진진이 자신을 둘러싼 가족, 친구, 연인과의 갈등과 대화를 통해 점차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간다. 단순한 사랑 이야기나 가족 드라마가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가족, 연인, 사회… 모순 없는 삶은 존재하는가
『모순』이라는 제목은 단순히 진진의 인생이 복잡하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의 진짜 힘은, 등장인물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모순'을 안고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모순은 작가의 섬세한 문체를 통해 살아 있는 인간의 얼굴로 변주된다.
진진의 어머니는 과거의 결혼 실패에 매여 있으면서도 딸에게는 누구보다 강한 인생의 조언자다. 한편으로는 딸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엄격하게 거리를 두려 한다. 이런 이중적 태도는 현실 속 부모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외삼촌은 가족을 등진 인물이지만, 진진에게는 따뜻한 위로를 주는 존재가 된다. 그는 세상에 대해 체념한 듯 보이지만, 실은 진진을 누구보다 세심하게 이해해주는 어른이다. 외삼촌과 진진의 관계는 혈연이 아닌 정신적 공감대가 만드는 특별한 유대를 보여준다.
진진의 친구들 또한 겉으로는 자유롭고 쿨해 보이지만, a각자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상처와 불안을 품고 살아간다. 이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타협하며 자신만의 생존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우리 모두는 모순덩어리다"라는 메시지를 조용히 건넨다. 어떤 관계도 완벽할 수 없고, 어떤 감정도 일관되지 않으며, 누구도 한 가지 성격으로만 정의될 수 없다. 『모순』은 이처럼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불완전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진진은 사랑을 주고받으며 삶의 의미를 배워간다.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의 충돌, 정체성의 혼란, 존재에 대한 불안. 이 모든 요소가 독자가 진진의 여정을 자기 삶처럼 느끼게 만든다.
흔들리고 상처받으며,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모순』을 다 읽고 나면,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본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소설은 빠른 전개나 극적인 반전이 없다. 대신 우리 삶처럼 천천히, 조금씩, 때로는 돌고 돌아가며 진실에 다가간다. 양귀자 특유의 담백하면서도 깊이 있는 문체는 이러한 여정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든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진진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이다.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결국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진은 때로 감정적이고, 어리석고, 흔들리지만, 그 모든 자신을 인정하게 된다. 이 과정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통과의례다.
소설 속에서 진진은 민우와의 관계, 어머니와의 갈등,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삶의 복잡성을 배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진진이 타인을 판단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점차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이다. 이는 성숙의 핵심적인 과정을 보여준다.
『모순』은 단지 한 여성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안진진이 될 수 있고, 이미 그와 같은 삶을 살아왔거나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다시 꺼내 읽고 싶은 작품이 된다. 감정을 정리하고 싶을 때, 인간관계에 지쳤을 때, 혹은 그냥 위로가 필요할 때 이 책은 조용한 친구처럼 옆에 있어준다.
무엇보다 『모순』은 '말을 아끼는 책'이다. 독자에게 끝없는 조언을 하지 않는다. 대신 섬세한 문장으로 조용히 길을 비춰준다. 우리는 그 속에서 자신만의 해석을 만들고, 스스로 답을 찾아간다. 이것이 양귀자의 문학이 가진 큰 미덕이다.
『모순』은 완벽하지 않은 나, 모순된 나를 있는 그대로 끌어안게 만든다. 그리고 그 수용이 끝내 삶을 버티게 하고, 또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깊고 조용한 소설이다. 서로 다른 시기에 읽더라도 매번 새로운 울림을 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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