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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리뷰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진실의 미끼를 삼킨 한 과학자의 여정

by minorwtgr 2025. 4. 18.

 

분류의 환상과 존재의 질문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과학자의 전기가 아닌, 인간의 지식 체계와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철학적 탐구입니다. 책은 19세기 미국의 자연주의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좇아가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분류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조던은 물고기 분류학의 선구자로, 수천 종의 물고기를 발견하고 명명했지만, 그의 여정은 역설적으로 그가 평생 추구한 분류 체계의 환상을 드러냅니다.

 밀러는 조던의 삶을 통해 인간의 지식 추구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는지 보여줍니다. 조던이 평생을 바쳐 구축한 물고기 분류 체계는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파괴됩니다. 그의 수집품, 라벨, 그리고 온갖 기록들이 혼합되고 파괴되는 순간, 그가 세상을 정리하려던 시도가 얼마나 인위적이었는지가 드러납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특정 해양 생물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물고기'라고 부르는 분류 자체가 인간이 만든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밀러가 묘사하는 조던의 삶은 기존 전기와는 달리, 그의 성취와 함께 어두운 측면도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조던은 우생학 지지자였고, 그의 냉철한 과학적 접근은 때로 인간성의 부재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복잡한 인물을 통해 밀러는 지식과 도덕,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의 긴장을 탐구합니다. 조던의 삶은 분류의 열정이 어떻게 타인의 인간성을 분류하고 등급 매기는 위험한 길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가 됩니다.

 

 

혼돈 속의 질서와 개인적 지진의 여파

 

 책의 중심에는 질서와 혼돈 사이의 근본적인 갈등이 자리합니다. 조던은 자연의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으려 했고, 그의 분류 체계는 그 시도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지진이 그의 작업을 파괴했을 때, 그는 놀라운 결단력으로 재시작합니다. 밀러는 이 순간을 단순한 회복력의 사례가 아닌, 조던의 고집스러운 확신과 자신의 분류 체계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믿음의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이 책은 또한 밀러 자신의 개인적 '지진'과 평행선을 이룹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혼과 정체성 위기를 조던의 이야기와 교차시키며, 개인적 차원에서 분류와 질서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우리의 자아와 관계를 제한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밀러가 자신의 결혼과 이혼을 통해 배운 교훈은 조던의 이야기에 더 깊은 감정적, 철학적 차원을 더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엄격하게 분류하고 통제하려는 시도가 어떻게 진정한 연결과 성장을 방해했는지 성찰합니다.

 이 책의 특별함은 과학 역사와 개인적 회고록, 철학적 탐구를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밀러의 능력에 있습니다. 그녀는 어려운 과학적 개념과 역사적 사실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면서도, 그 안에 깊은 인간적 통찰을 녹여냅니다. 조던의 학문적 여정과 밀러의 개인적 위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독자는 자신의 삶과 세계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을 분류하고 정리하려 하지만, 그런 시도의 한계와 위험성은 무엇일까요?

 

 

불확실성의 수용과 경계의 재구성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밀러는 조던의 삶을 통해 배운 교훈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독자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엄격한 분류와 확실성에 대한 집착을 넘어, 우리는 어떻게 더 유연하고 열린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할 수 있을까요? 밀러는 불확실성을 수용하고, 우리가 만든 경계의 인위성을 인정하는 것이 더 풍요로운 삶과 깊은 이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과학 이야기나 회고록을 넘어, 인간의 지식과 이해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만든 체계가 얼마나 취약하고 인위적인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도가 왜 필요하고 가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밀러의 유려한 문체와 깊은 통찰력은 이 복잡한 주제를 접근 가능하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전달합니다.

 책을 읽으며 독자는 자신의 삶에서 만들어온 분류와 경계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실제로는 우리의 인식과 필요에 의해 구성된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은 불안을 일으킬 수 있지만, 밀러는 그것을 해방의 가능성으로 제시합니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엄격한 분류의 제약 없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 책은 과학, 철학, 개인적 성장의 교차점에서 우리의 지식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그 과정에서 삶의 혼돈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어떻게 동시에 제한적이면서도 필요한지, 그리고 그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이 어떻게 더 깊은 지혜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